열정을 향한 첫걸음
책만 펴면 졸려서 독서가 안된다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클래식 음악은 졸려서 들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필자 역시 초등학교 시절 필독도서를 읽고 독후감을 제출해야 했던 고통(?) 때문이었는지 책만 들면 괴로웠다. 일부 음대 지망생들 가운데 자신의 전공분야를 제외하고는 도통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친구들도 있다. 반대로 깊은 관심과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부류도 존재한다. 갈만한 음악회를 리서치하고 비용을 들여 콘서트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아티스트 뿐만아니라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내공을 지닌 음악가들을 선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도 있다. 음반을 비교해 들으면서 나름대로의 촌철살인 감상평을 기록하고 관련 서적까지 탐독할 정도라면 꽤 중증이라고 할 수 있다.
1939년 생인 필자의 부친은 6.25 직전 한 바이올리니스트로부터 어깨 넘어 서양 음악을 처음 접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또래 기업가 S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현악 앙상블 연주를 즐긴다. 이 모임에는 두 명의 노 신사 외에, 퇴근 후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법한 평범한 직장인, 개인병원 의사,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공부한 무역회사 중역, 그리고 취업 준비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음악 때문에 친구가 된 이들은 매 주 날짜를 정해 악착같이 모이고 개인적으로 레슨을 받는 것은 물론 지인들을 모아 작은 콘서트까지 열고 있다.
S는 젊은 시절 미국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유명 무역회사에서 경험을 쌓다가 독립하여 회사를 설립했다. 자신이 세운 회사를 경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취미활동(?)에 열을 올렸는데, 관심분야는 현악기였다. 예전부터 S의 사무실에는 경영이나 경제 관련 서적들보다는 악기나 연주자들에 대한 화보나 사전, 그리고 음악잡지들로 가득차 있었다. 외국 출장 중 틈나는대로 유명한 현악기 박람회나 경매장, 그리고 세계 굴지의 현악기 딜러와 수리상을 찾아다니면서 상당한 인맥을 쌓게 되었다. 몇 년 전 회사의 주종목인 비료대신 현악기로 전환하겠다 선언하고, 영국에 본사를 둔 세계 최고의 현악기 딜러와 손을 잡았다. 수 십년간의 변치 않는 우정이 딜러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이 S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아시아 브렌치를 서울에 열게 되었다. S의 고상했던 취미 활동이 직업으로 탈바꿈하게 된 셈이다.
동료의 소개로 알게된 B는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프랑스인이다. 그녀는 가진 대단한 취미가 있는데 바로 클래식 음악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이 블로그를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보통 음악관련 블로그라고 하면 음반정보 내지는 리뷰, 아니면 이런 저런 음악계 소식이나 인물 소개를 전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녀의 블로그는 본인이 직접 참석했던 음악회에 관한 내용으로만 이루어졌다. 2008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약 530여개에 달한다. Met Opera의 웬만한 프로덕션과 뉴욕을 찾은 유명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물론이고 화제가 될만한 실내악 공연이나 피아니스트 등,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듯한 연주가의 콘서트 리뷰는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많을 때는 한 달에 19개의 리뷰가 올라온다. 쉽게 말해 이 블로그 하나만 보면, 지난 7 년 동안 뉴욕의 클래식 음악계의 주요 동향을 읽을 수 있는 셈이다. 이 많은 음악회를 찾아다니기 위해 들인 시간과 비용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의대 진학을 꿈꿨던 생물학도가 비영리단체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전공으로 진로를 바꿔 지금은 음악 관련 단체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기도 하고, 유명 투자은행 간부였던 사람이 음악 활동을 위해 직장을 옮기기도 한다. 또 어떤 분들은 자녀의 음악 레슨을 통해 자신의 꿈과 열정을 이어가기도 하고, 어린시절 악기를 배웠던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 음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자연스런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정말 음악을 좋아한다면, 아니 음악을 좋아하고 싶다면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